
세한도를 생각하며 만든 추사관
제주도 서남쪽, 대정읍에 추사관이 있다. 과거 추사 김정희가 유배했던 곳에 만들어진 김정희를 기리는 장소이다.
현대 우리나라에 주요한 건물을 많이 지은 승효상이 건축했다. 버스를 내려 걸어가는 길 성벽 같은 네모반듯한 벽이 보인다. 그리고 지붕과 함께 흔히 생각하는 집 모양의 큰 건물이 나타난다. 앞에는 노란 꽃이 한창이다.
승효상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생각하며 건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세한도(歲寒圖)는 추사 김정희를 대표하는 문인화다. 제자 이상직에게 보낸 그림이 보존되어 국보가 되었다.
세한도는 추운 계절을 나타내는 그림으로, 추사 김정희 본인의 인생에서 추운 시절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라고 한다. 그리고 붙여진 글에서 제자 이상직에게 고마워하고 칭찬하는 의미로 측백나무와 잣나무를 그렸다 표현한다. 모든 잎이 다 지고 가장 늦게까지 푸른 측백나무와 잣나무를 생각해 보라.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이다.’라는 말처럼 모두가 자기를 외면할 때 챙겨준 제자가 얼마나 고마웠을까?
추사 김정희는 명문가에서 태어났고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도 했다. 하지만 조선말 안동 김씨와 같은 세도가가 조정을 독점하고 자신들 마음대로 나라를 운영했다. 그런 상황에서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로, 북청으로 유배 생활을 했다.
그런 힘든 가운데 내부를 단단하게 다져나갔다. 유흥준의 ‘안목’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제 글씨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저는 일흔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1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습니다.
-출처: 유흥준의 안목-
제주도 유배 생활 중 추사 김정희는 그 유명한 추사체를 완성했다. 개인적으로 서예에 무지하다. 그래서 전시된 글씨를 봐도 멋있다. 쓴 이의 아우라가 느껴진다고 정도만 느낄 뿐이다. 전체 서예 역사를 알거나 조예가 있다면 다른 서예 작품과 비교하여 느끼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제주 여행을 다니다 보면 추사 유배길 표지를 찾을 수 있다. 제주도 북쪽 화북포구에서 내린 추사 김정희는 험난한 길을 말을 타거나 걸어 제주도 남쪽 대정현까지 왔다. 화북포구는 당시 중요한 제주의 중요한 관문이었다. 현재 제주항 국제여객터미널 동쪽에 있다. 이곳에 가면 제주 바다를 둘러싼 방어용 성벽 환해장성을 볼 수 있다.
제주 대정읍에는 대정향교가 있다. 향교는 중앙 정부에서 만든 것으로 여기가 조선 시대 중요한 거점이라는 의미가 있다. 조선 시대 대정읍은 대정현이라 불렀고 중죄인을 처벌하는 장소였다. 많은 정치범이 유배를 왔다고 한다. 제주를 다니다 보면 광해군 유배길 표지판도 보이고 천주교 순례길도 보인다.
유배 온 김정희는 송계순의 집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강도순으로 집으로 옮겼다. 강도순의 집은 제주 4. 3 중 불타 버렸다. 지금 추사관 뒤에 그의 집은 후손의 증언을 바탕으로 복원된 것이다.
추사관은 넓은 공간에 작품을 담고 있다. 담백한 느낌의 건물은 작품을 두드러지게 한다. 창은 제주 풍경을 비추고 있다. 좋은 미술관이나 전시 공간은 전시 자체도 뛰어나지만, 전시를 보고 나서 쉴 공간을 준다. 창 너머 하늘이나 나무들이 보이는 건 기분 좋다.
제주 역사와 관련된 여행을 하고 싶다면 추천하고 싶다. 대정향교, 정난주 마리아 묘 등이 근처에 있다. 정난주 마리아는 천주교 역사에 조금 관심 있거나 정약용에 관심 있는 사람은 알 수도 있는 인물이다. 백서 사건을 일으킨 황사영의 부인이자 정약용의 조카인 정난주는 세례를 받았고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백서 사건으로 엄청난 숫자의 천주교인이 탄압받았고 특히 정약을 포함한 남인 시파 세력이 절멸하는 사건이 되었다.
제주도로 유배 온 정난주 마리아는 죽을 때까지 이곳에 살며 천주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그녀가 묻힌 장소가 남아 있다. 추사관에서 걸어가기는 멀고 버스는 자주 다니지 않는다.
두 유배자는 처지가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살던 곳에서 쫓겨나 가족이나 친지들과 떨어져 사는 상황은 비슷했을 것이다. 원하지 않는데 좋아하는 사람, 익숙한 것들과 헤어져야 한다면 어떨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다만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살 때 남긴 글씨나 그림으로 느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