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볕이 잘 드는 집, 박차정 삼남매 독립운동가 생가 -약산소식지 허예주 기자
개인적으로 약산 김원봉을 다르게 본 게 해방 후 아내의 유해를 가지고 귀국했다는 이야기였다. 동지이자 아내였던 박차정 의사는 강서성 곤륜산 전투 중 부상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쉽지 않은 귀국길에 김원봉 의열단장을 아내의 유해를 챙겼고 자기 고향 밀양에 묻었다.
독립운동가 귀국길은 험난한 이야기가 많다. 백범일지를 비롯한 많은 이야기를 보면 해방 후 한국을 점령한 미군은 독립운동가 귀국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중국 등 외국에서 마땅한 교통수단도 마땅치 않았다. 운 좋으면 차를 얻어 타고 대부분 머나먼 길을 걸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와중에 독립운동 관련 활동도 하지 않은 것들이 모자 하나만 얻어서 독립군 행세를 했다.
그런 와중에 아내의 유해를 챙겨서 온 그가 멋있었다. 전투 중 부상으로 사망한 여전사 박차정은 부산 출신이다. 그의 집안 삼남매 모두 독립운동에 자신을 바쳤다. 오빠 박문희는 6.25 중 행방불명, 동생 박문호는 항일 독립 중 잡혀 고문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 박용한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분개해 자결한 분이다.
오빠 박문희는 신간회 등 항일 독립 활동을 열심히 했고 동생 박차정도 어린 나이부터 관심을 가졌다. 항일 운동 주도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없어 가족이 업고 나왔다고 한다. 일제는 만세 운동을 한 어린 학생들도 잔인하게 고문했고 우리가 잘 알듯이 유관순은 감옥에서 순국했다. 당시에 정말 많은 유관순 같은 사람들이 있었고 심하게 고문을 당했다. 감옥을 나온 이들도 후유증으로 죽거나 남은 생애 동안 정상적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후유증을 겪었다.
그러나 박차정은 고문 후 자기는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니 더 열심히 항일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기개로 근우회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했고 오빠의 권유로 한국을 떠났다. 의열단에 가입하기까지 했다. 남자 못지않게 싸웠던 여전사 박차정을 나는 몇 년 전에야 알았다. 그 외에도 항일 독립운동에서 김명시 장군 등 많은 여성 전사가 있다. 그러나 여성 단체들조차 이런 여성을 잘 알려주지 않는 것 같다.
그래도 박차정 의사 생가는 잘 복원되었다. 마산 출신 김명시 장군은 벽화로 기리고 있다. 박차정 의사 생가는 동래 고등학교 뒤 조용한 동네에 있다. 누군지 몰라도 정비를 잘해서 찾아가는 길 표시가 잘 되어 있다. 입구는 삼남매를 기억할 수 있는 작은 공원을 만들었다. 집은 작지만, 햇빛이 잘 드는 기분 좋은 집이다.
집 안에 여러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작은 공간이지만 동네 산책하듯 잠시 다녀오기 좋다. 성남문화재단에서 만든 ‘의열의 시대’라는 박차정 웹툰이 있다. 지역 문화재단에서 이런 좋은 웹툰을 만들다니 감사하다.
‘의열((義烈)’은 의로운 일을 맹렬히 한다는 뜻이다. 의열단이 창립될 때 당시 독립운동 단체들이 온건하다고 생각했던 의열단은 다른 방향의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싶어 했다. 백범 김구도 의열 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우리가 아는 윤봉길 이봉창 의거를 이끌었다.
이렇게 자기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길이 다 쉽지 않았다. 박차정 의사도 동생 우하 박문하의 노력 덕에 인정받을 수 있었다. 우하 박문하 선생님은 의사이자 수필가이다. 그리고 동래구에서 우하 박문하 문학상을 조례로 통과했다.
2025년 8월 현재 우하 박문하 문학상 작품을 접수 중이다. 이렇게 누군가를 기리는 것은 좋다. 말은 얼이고 글은 그의 정신을 담는다. 박문하 선생님이 가진 좋은 생각, 나아가 박문하 선생님 형제들의 독립운동까지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 좋다. 앞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을 기리는 문학상이나 대회를 지자체에서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독립운동가를 한 번씩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