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념관 입구에서 우리를 맞아주는 백정기 선생님 - 약산소식지 허예주 기자
백범 김구 선생님이 아꼈던 독립운동가가 많다. 그 많은 사람 중 애절하다 표현할 수 있는 분이 구파 백정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해방 후 김구 선생님은 세 명의 의사의 유해를 꼭 찾아오도록 박열 이강훈 등 독립운동가에게 부탁했다.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세 분이다. 해방 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백범 김구 선생님은 같이 독립운동했던 동지를 잊지 않고 그중 제일 먼저 이 세 분의 유해를 찾아 묘역을 만들었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를 모실 자리에 가묘를 만들었다.
이 세 분을 모신 묘역은 삼의사묘로 불리고 현재 효창공원 안에 있다. 효창공원에는 2002년 백범 김구 선생님을 기리는 백범 김구 기념관이 세워졌다. 독립운동가 거장을 위한 공간이 2000년이 넘어서야 세워지다니 해방 후 위정자들은 독립운동가에게 너무 박했다고 생각한다.
해방 후 위정자들이 김구 선생님에 대한 대우가 이런데 다른 독립운동가는 오죽했을까 싶다. 외교로 협상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독립운동가 유해를 찾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 알고 싶다. 김구 선생님은 개인의 노력으로 세 분을 조국으로 모셔 왔다. 그렇다면 나라에서 모셔올 수 있는 분은 더 많았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수가 너무 적은 게 아닌지 싶다.
이렇게 김구가 해방후 모셔 왔던 구파 백정기는 상해 육삼정 의거에 실패하고 나가사키 감옥에서 순국했다. 상해 육삼정에서 일본 고위 관료 비밀회의가 열린다는 첩보를 들고 철저히 준비해서 의거를 계획했지만, 동료라 믿었던 일본인의 배신으로 모두 잡혔다.
독립운동 거사 계획 자체도 쉽지 않지만 가장 큰 적은 내부의 배신이다. 가끔 드물게 한민족을 도와주는 외국인이 있다. 박열의 부인이자 무정부주의자 가네코 후미코같이 적극적으로 도와준 이도 있다.
무정부주의라는 우리말이 있는데 굳이 아나키스트라는 말을 쓰는 한국인을 이해 못 하겠다. 무정부주의가 이해하기 더 쉽지 않은지 묻고 싶다. 해방 후 무정부주의도 나쁜 사상으로 취급하며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독립운동한 이를 헐뜯는 사람들을 보면 일본인인가 싶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을 지배하던 유교 사상은 무너졌다. 지난 연재에서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에 국가와 같은 큰 조직이 하나로 뭉치는 게 가능하다.
믿고 따라 살던 것이 사라지면 인간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인생의 구심점이 될 새로운 믿음을 찾게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독립운동가들은 학문적으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인 것도 있고 독립운동에 도움을 줄 사람을 위해 새로운 사상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사상은 모두 독립운동을 위한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그러한 사상에서 가장 괜찮은 것이기에 현대 세계 여러 나라가 국가의 이념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다 당시 서구 열강은 식민지 전쟁으로 바빴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도 식민지를 가진 열강을 위한 것이지 나라를 뺏긴 이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준 열사가 왜 자결했는지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그런 와중에 소련의 새로운 세력 볼셰비키는 도와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도 한민족을 이용했다 생각했던 사람은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독립운동가 중 무정부주의를 택한 이들은 일제와 같이 어떠한 압박하는 권력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 동조한 일본인 무정부주의자도 한민족 독립을 도왔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본다.
구파 백정기의 묘는 서울 효창공원에 있지만 그가 태어난 정읍에서는 그를 기리는 기념관을 만들어 그를 기억하려 한다. 기념관 앞은 ‘구파로’이고 버스가 다닌다. 버스는 동학농민혁명을 떠올리게 하는 황토색이다. 정읍시에는 독립운동가 기념관이 세 곳이나 있다. 광역시도 아닌 전라남도에 속한 시에서 독립운동가 기념관이 세 곳이나 있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정읍이 더 놀라운 것은 동학의 중심지이다. 조선말 탐욕스러운 관리의 학정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인간다운 삶은 외치며 봉기를 했다. 그러나 무능한 왕에게 속아 무기를 거두고 일상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배신을 당했다. 무능한 왕은 외세를 끌어들여 자신을 믿는 백성을 죽이고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가족들을 학대했다. 매국노가 할 짓이다.
그러나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던 동학 농민의 정신은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이어졌다. 구파 백정기 기념관 멀지 않은 곳에서 그의 생가를 복원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던 백정기, 그의 집은 볼 것 없이 작고 초라하다. 그런 실제적인 것이 좋다. 그러나 주변은 깔끔하게 정리해서 방문객을 맞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