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호 독립운동가 가족 사진, 왼쪽 김재호 독립운동가 가운데 아버지 김복현 독립운동가 오른쪽 부인 신정완 여사
1976년 7월 6일 독립운동가 김재호 선생님이 돌아가신 날이다. 전라남도 나주출생이다. 할아버지부터 집안이 의병과 독립운동을 한 뼈대 있는 명문 집안이다. 한국은 연예인 중 고위 관료를 지내면 명문 집안 출신이라고 높이 세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독립 운동 한 집안을 더 높이 쳐 주었으면 좋겠다. 삼대가 독립운동을 했으니 진정한 한국의 명문가라고 부를 수 있다.
아버지 김복현은 광주 만세 시위 책임자로 추대되었고, 1919년 3월 10일 광주시장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에서 시민과 학생 1,000여 명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된다. 이어 소위 보안법·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또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참여해 다시 일경에 체포된다. 해방 후에는 항일운동을 이어 민주화 운동을 했다. 5·16군사정변 때 반대운동을 벌여 옥고를 치뤘다. 1890년 에 태어나셨으니, 1961년이면 일흔이 넘은 나이이다. 버트런드 러셀이 말년에도 평화 운동하다 감옥갔다고 대단한 인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에도 70이 넘은 나이에 민주화 운동을 위해 감옥에 간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김창균은 나주 향리의 대표적 인물이었다고 한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을 시해하고 11월 15일 단발령을 공포했을 때 일어났던 을미의병을 같이 하려 했다. 그러나 나주의병은 미처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도 전에 관군인 전주진위대에 의해 진압된다. 김창균은 1896년 5월 5일 보성에서 관군에게 붙잡혀 총살되고 아들 석현도 피살되어 순국했다고 한다.
참고로 김복현은 김창균 의병장의 다섯째 아들이다. 이 분에 관한 많은 일화가 내려오는데, 그중 친일 부역자의 포상을 거부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립유공자를 추서하고 연금을 지급하는 제도를 만들자 “내가 일본군 앞잡이 하던 자에게 훈장 받으려고 독립운동을 했느냐”고 역정을 내며 끝까지 거부했다고 한다. 진정한 항일운동을 하던 이의 기개가 느껴지는 일화이다.
김복현 독립운동가의 아들 김재호 선생님은 1933년 2월경 상해(上海)에서 온 정의은(鄭義恩)과 같이 남경(南京)으로 가 의열단(義烈團) 간부학교에 입학하여 독립전쟁의 훈련을 받았다. 여기서 제2기생으로 졸업하고 항일운동 지하 공작원(地下工作員)으로 활동하다가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충칭[重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선전위원이었다. 1943년 3월에 임시정부 내무부 총무과장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를 실무적으로 이끌어나갔다고 한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아 임시정부의 잔무를 정리하고 1946년 5월에 귀국하였다고 한다.
독립운동 활동 중 독립운동가 해공 신익희 선생님의 외동딸 신정완 여사와 결혼했다고 한다. 신정완 독립운동가는 아버지 신익희 선생님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했고, 중국에서 독립운동했다. 1937년 중국 난징〔南京〕 등지에서 활동하던 김원봉(金元鳳)의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동참하였다. 1939년부터 1941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산둥성〔山東省〕 제2전구 사령부의 공작원으로 파견되어 지하공작 첩보 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에는 귀국해서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지도위원과 박정희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민주회복국민선언에 독립운동가를 대표해 참여했다.
공훈만 살펴봐도 대단한 분인데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해서인지, 김재호 독립운동가의 생가나 기릴만한 장소가 남아 있지 않다. 본적을 검색하면, 현재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고 어떠한 표시도 있지 않다. 다행인 것은 부부 모두가 대전현충원에 묻혀서 공적을 인정받았다고 하는 정도일 것이다.
김재호 독립운동가를 우연히 알게 되어 검색하다 보니 마음이 먹먹할 뿐이다. 삼대가 을미 의병과 독립운동을 했지만, 국가에서는 현충원에 모시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같다. 비단 김재호 독립운동가 집안만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후손이나 그를 기리는 후세의 누군가가 없다면 해방 후 한국 정부는 독립운동가를 제대로 기릴 장소를 만들지 않는다. 전국에 100여개가 넘는 독립운동가가 넘는 장소를 다니며 느끼는 것은 민간이 독립운동가를 챙기지, 나라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운이 좋으면 현충원에라도 모셔져 있고, 생색내듯 기념관 하나라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그 기념관이 6. 25 사변 기념관보다 초라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더 문제는 독립운동가의 생가나 고가를 제대로 보존하지 않아서 사라진 경우도 많고 사라질 위기에 놓인 경우도 많다. 개발의 논리에 밀려 고가가 사라진 경우, 그나마 비석이나 표지판이라도 하나 세우면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말씀이 독립운동가 생가나 관련 장소를 갈 때마다 느껴진다. 해방 후 친일 부역자가 기득권이 된 한국은 독립운동가를 기리기보다 지우기 바빴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 교과서에 독립운동가가 만든 노래나 쓴 글보다 친일 부역자가 만든 노래나 쓴 글이 더 많이 실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안중근, 안창호 윤봉길 선생님과 같이 우리가 알만한 독립운동가가 남길 글이나 노래가 상당히 많다. 그걸 찾아서 후대에 물려 줄 노력을 하지 않는 교육부 보훈부 문화체육부는 과연 한민족을 위하는 정부 기관인지 의심이 든다.
김재호 독립운동가와 일가를 잘 이야기한 글
http://www.obangmuseum.or.kr/index.php?sid=36&wbb=md:view;uid:40;&page=1
3대에 거친 항일운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