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프란 안예은 8호 감방의 노래
안예은 음악가가 재해석해서 만든 독립운동가의 노래가 ‘8호 감방의 노래’이다. 서대문 형무소라는 끔찍한 곳에 삼일 만세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붙잡혀 들어가 어려운 시절을 보내던 여성 독립운동가 7인 등이 불렀다고 전해지는 노래이다.
유관순 권애라 김향화 독립운동가 정도는 역사에 관심 있으면 들어보았을 이름이다. 그래도 소중한 우리 독립운동가이기에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한 번 따로 쓰려고 한다. 이번 기사에서는 조금 이름이 낯선 네 분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소개하려 한다.
심명철(沈明哲) 독립운동가는 심영식(沈永植)이라는 이름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심영식 독립운동가는 개성의 첫 번째 만세 시위를 권애라 독립운동가와 함께 촉발했다고 한다. 이 때 같이 한 분이 신관빈 어윤희 독립운동가이다.
개성에는 1919년 2월 28일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으나, 배포 계획을 수립하지 못한 채 북부예배당 지하에 은닉되었다. 이때 호수돈여학교 부설 유치원의 교사로 있던 권애라 독립운동가가 용감하게 배포하는 일에 앞장섰다. 오후 2시경 어윤희는 신관빈(申寬彬)과 함께 만월정(滿月町) · 북본정(北本町) · 동본정(東本町) 일대의 행인 수십 명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독립선언서 배포 이후 개성의 첫 만세시위는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이 주도하였다. 3월 3일 오후 2시, 호수돈여학교 학생 35명이 찬송가와 독립가를 부르며 거리에서 만세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의 수는 일반 군중들이 가세하면서 1,000여 명까지 늘었다.
그리고 권애라 심영식 신관빈 어윤희 삼일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이들이 잡혀간다. 이로 인해 심영식 독립운동가는 1919년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권애라, 어윤희, 신관빈과 함께 유관순이 감금되었던 서대문 감옥 여옥사 8호 감방에서 수감 생활을 하였다. 1919년 10월에 가출옥하였다.
1920년에 3·1운동 1주년을 맞아 개성 미리흠여학교 학생들과 만세 시위를 준비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6개월 만에 가출옥하였다. 투옥 중 간수에게 뺨을 맞아 고막이 터져 평생 한쪽 귀에서 고름이 나오는 후유증으로 고생하였다고 한다.
신관빈 독립운동가는 당시 호수돈여학교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기독교 전도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3월 2일 교회에서 체포되어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11일 만기출옥했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18일자에 실린 ‘출옥자 감상문’에 따르면 그는 감옥생활에 대해 “사람으로는 받지 못할 만큼 망측한 대접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출옥자 감상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출옥자의 감상
신관빈 녀사(여사)의 말
별로 이텃타는(이렇다 할) 특별한 감상을 말할 것이 없습니다. 원래 작년 삼월 이애로 수백명의 녀자가 입옥하얏스나 대개는 방면되고 지금은 소요범인으로 남은 사람은 십여인밧게(십여인 밖에) 나지 못하였습니다. 옥중에서 지내는 심함은 의례히 그러한줄 아랏스닛가 별로 놀랄 것도 없고, 별로 고통을 느길것도 없섯슴니다.
저는 작년 삼월 초순에 개성에서 선언서를 배부하고 그 잇흔날(이튿날)례배당에 갓다가 잡히어 옥중에 도텨가 일개년동안 복역하고 나왓습니다. 마루바닥위에 다다미를 깔고 그 위에서 자는데 사람 네 며 압헤(앞에) 일본이불 한아식(하나씩)을 주옵니다. 그러나 엇터케 윈운지 모미 모다 일어서 뇌터지고 압하(아파) 참아 견딜수 없섯슴니다. 그러 한증 더욱이 간순의 가혹한 풀은 무엇이라 말하야 옳을지 그도 사람인가 인정늘가진 동물인가, 의심할만큼 심혹하옵니다. 물론 그 속에서 하고지내는 품이나 대우 받는 것은
사람으로는 밧지 못할만큼 망측하옵니다. 이제 우리의 할일은 아못조록(아무쪼록) 청년남녀를 교육을 만히 식하여 수용할 인재를 양성하여야 하겠슴니다. 우리가 제일 통철하온긴 것을 우리의 사회에 인재의 결핍이올시다. 돈만히 가진 부자들은 쓸데없는 사치를 좋 덜하고 비단옷 좀 덜 입고
자동차에 실고 다니는 기성 좀 덜 실고 다니고 아못조록 절약하야 우리의 자매를 교육할 만한 학교를 만히 설립하고 수용할 청년을 뽑아서 해외로 유학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어서어서 우리도 남파간치 배와야 하겠슴니다. 조선 사람들의 쓸데업시 관혼상제에 성대히 음식을 준비하고 기성(기생)을 몃식 부르는 것은 보면 참 통분하옵니다. 그들은 왜 지금 세상이 엇더한것인지를 세닫지 못하는지요? 왜- 좀 사람다옵게 살 줄은 모르는지요? 스코필드씨가 조선 사람들의 흉을 잘 보지요. 그림서 조선 사람들은 그 사람은 조션 사람 흉만 보는 사람이라고 하지요만는 사실이 그런 것을 엇지 하옵니가 도로혀 용서업시 말해주어 우리로 하야금 반성하게 해주는 것이 도로혀 고맙슴니다.
출처: 1920년 4월 18일자 동아일보 기사 (띄어 쓰기와 괄호 안 현대어는 필자가 표기한 것임)
임명애 독립운동가는 파주의 첫 만세 시위를 주도한 분이다. 1919년 당시 남편 염규호와 함께 구세군으로 활동 중이었다. 1919년 3월 10일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에 있는 교하공립보통학교에서 임신한 몸으로 학생 1백여명을 이끌고 앞장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날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어 1919년 6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투옥 당시 임신한 상태로 출산을 위해 잠시 가출옥했다가 1919년 11월에 재입감되었다. 1920년 9월 25일에 만기출옥했다.
권애라, 심영식, 신관빈, 임명애 지사
제암리 학살사건을 알린 스코필드 선교사


